(예전에 썼던 ‘없다에 걸린 실수’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읽다가 ‘아, 전에 봤던 이야기인데 살짝 다르기만 하구나. 지루하다’ 싶으시면 그냥 넘어가 주세요. (웃음) )
제가 조금 공부에 진척이 생겨서 들뜬 기분으로 공부에서 알게 된 것들을 말씀드렸을 때, 저를 지도해 주신 분들께서 말씀하신 것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겠지 하는 식으로 (웃음) 고개를 끄덕거리시면서 들어주시다가, 이제 충분히 들어줬다 싶으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봤으면 이제 내려놓아라”. 그런데 저는 사실 처음 그 지도를 들을 때는 들어도 모르고, ‘물론 그래야지요’라고 열정적으로 수긍해도 사실은 모르고, 그 이후에 실수에 실수를 반복할 때도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식의 실수인가 하면, 대강 이런 식의 실수입니다.
무상하다고 해서, ‘그래, 봐, 무상이잖아?’ ‘그래, 봐, 무상이잖아?’ ‘그래, 봐, 무상이잖아?’ ‘그래, 봐, 무상이잖아?’ ‘그래, 봐, 무상이잖아?’ ‘그래, 봐, 무상이잖아?’ (무한 반복)
무아라고 해서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그래, 봐, 무아잖아?’ (이 또한 무한 반복)
조금이라도 공부가 ‘생겼다’ 싶으면 그것이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예뻐서 죽고 못 사는 거예요. (웃음) 그것만 보고 또 봅니다. 덕분에 그 외의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요. 그러다 보면 무상이어서 스스로 풀어지려는 것을 오히려 ‘무!상!’이 붙드는 나머지 지나가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무아라서 스스로 화합하는 것을 오히려 ‘무!아!’가 붙드는 나머지 대립하게 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는 때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무상이 있으면 항상이 생기기 마련이고, 무아라고 하면 어디선가 자아가 숨어있기 마련이지요. (웃음) 백만 번 천만번 반복해도 질리지도 않아요. 에너자이저 백만돌이와 듀라셀 토끼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물론 이런 실수들은 단지 무상이나 무아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공부’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소지가 있더라고요.
그럴 때 ‘무상하다고 하는 그것도 무상하다’라든지, ‘무아라고 하는 놈은 무엇인가’라고 해도 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술 더 떠‘그래, 무상하지!’라든지, ‘그러는 놈은 없다’ 등등, 아주 훌륭하고 섬세하게 사기를 칩니다. ‘집착하는 거 아냐?’라고 불안해하면 마음 한 구석에 숨어서 조금 볼륨을 줄인 뒤 계속 합니다. 도리어 공부를 얻기(!!!) 전보다 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입니다. 수행이 박제剝製가 되면 오히려 고생만 더하게 되어 수행을 안 하는 것보다 못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어느새 의지합니다. 의지하던 것이 항상 있는 나에서 무상하고 없는 나로 바뀐 것 뿐이었지요. 그러다가 의지하던 것이 통하지 않으면 또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웃음) 괴로움은 다시 반복되지만, 그 때도 괴로움 그 자체를 솔직하고 조건 없이 들여다 볼 생각은 안 하고 한 번 더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무상해. 그래도 무아야.’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도 무상하고 그래도 무아인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웃음) ) 괴로움이 너무나 심해진 나머지 강제로 들여다 보게 될 때까지는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괴로움은 제게 참으로 훌륭한 스승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다양한 종교 전통들에서 surrender(완전히 내맡기다?)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제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찌 말하자면 이 부분은 직관이 뛰어나다던가 오성이 날카롭다던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직하고 충실한 감정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부처님께 절하는 것을 기복 신앙과 관련해서만 생각했는데, 해보고 나서야‘아, 그런 부분들이 발생할 이유가 기복 신앙 외에도 있었구나’라고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을 때 (사실 그런 일을 해본 후에도!) 보통 끝의 끝까지 내려놓고 던져버리는 것은 던지기 전에는 좀 무서워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던진 후에 홀가분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말이에요. (웃음) 저는 그래서 더더욱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싶어요. 던지는 대신 ‘공부가 생긴 것을(!) 바탕으로 다른 무섭고 괴로운 것을 모두 없앨 수 있을 거야’ 하고 말이에요. 저는 생기기를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라 그런 실수 없이 훌륭하게 가는 다른 분들을 보면 감탄스럽지만, 저는 저의 공부가 있고 그 분들은 그 분들의 공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고조 할아버지 스승님(이 정도면 경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제 사조부님의 사조부님이시죠. (웃음)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깔끔하게 잊어버리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당시 그 말씀을 들으신 제 사숙조님께서는 ‘멋으로 하신 말씀인가 보다’ 하셨는데, 그 분 또한 몇 년이 지나서야 ‘그냥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었구나’라고 수긍하게 되셨다고 해요. 깨달은 것을 잊어버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족:
아래 부분은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되는, 그야말로 사족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오히려 방해되거나 ‘저 놈 괜한 짓 하는구나’라고 헛웃음하게 만들지도 몰라요. 그래도 읽고 싶으시면 페이지를 밑으로 내려주세요.
** 이 부분에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맡겨도 얻을 수 없다’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해와 분란을 부르는 말입니다만,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저는 ‘맡겨서 얻는다’가 아니라 ‘그냥 맡긴다’에 더 가깝다고 할 것 같아요. 내지는 ‘얻으려고 하는 마음까지 맡긴다’라고 해야 할까요. 역시 사족인 것은 변함 없지만요. (웃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 으아아아니!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데 그 외에 다른 것이 어디 있다고 이런 망발이오?
그렇네요. 그런데 만약에 무상이 아닌 것과 무아가 아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상락아정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어깨에 힘 빡! 주고 말하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웃음) 딱히 상락아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럼 무상이 아닌 것과 무아가 아닌 것은 뭔가요?
저는 이번 월요일에는 큰 수술이 잡혀있어서 이번 주말은 푹 쉬려고 합니다.
@@@ 질문들은 다른 분들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제가 실수에서 배운 부분들을 좀 더 나누기 쉽지 않을까 해서 적은 것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누굴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웃음)
@@@ 혹 이 글 어디선가 ‘아, 이 이야기 오래된 책에서 본 적 있어’라고 생각되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가능한 인용을 피하기 위해서 – 쉿! 제게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남기고 싶으시다면 비밀글을 달아주세요.
@@@ 한국의 선가에서 스승의 스승을 어떻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대강 Dharma Grandfather 법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사조부’라고 무협지 삘이 나는 단어를 적어보았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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