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저는 유위의 수행에 대해서 글을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솔직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한다면 유위의 노력도 언젠가는 무위의 노력이 된다는 것이 제 의견이었지요. (유위와 무위에 대한 설명도 그 글에 있는데, 밑에 링크를 달아두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옮겨감이 아니라 그냥 유위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불교에는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치는 거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허망하니, 그것들에 매달리거나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재가수행자로서 저는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꽤 고민이었습니다. 그 중 많은 부분은 제 직업에 관한 부분이었지요. 저는 그야말로 유위의 극치를 달리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든요. (가능하면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 계속 제 직장 이야기가 튀어나오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웃음) )
제가 하는 일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지만, 억지를 부려보자면 불교식으로는 무상함을 유예시키는 일이라고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표현에는 당연하게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고, 종국에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율은 0%에 도달하도록 되어있으니까요. (불생불멸이나 진아眞我 같은 것은 지금은 옆으로 치워놓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치료하는 암 중에는 말기의 경우 아무리 최선을 다해 수술과 화학방사선 치료를 한다고 해도 5년 생존율이 40%를 넘지 않는 암도 있습니다. ‘5년 생존율’이라고 해서 나머지 60%가 살 시간이 5년은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진단 후 6개월 후에 사망하든 4년 6개월 후에 사망하든 진단 후 5년 동안 사망한 60%에 들어가고, 사실 치료 후 암 재발은 대개 1년에서 2년 사이에 발생합니다. (폐나 척추 같은 곳에 전이된 경우 예후는 30%대로 더 안 좋아지지만, 이런 경우 완치를 위한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으니 제외한 수치입니다.)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수술은 기본이 6시간 정도 걸리고, 더 복잡해지면 10시간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술 후에는 병변과 함께 정상적인 피부와 점막도 같이 화상을 입히고 주변 근육에 흉터를 남겨 굳어지게 만드는 6주간의 방사선 치료가 병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젠가는 암으로 인해 기도가 막혀 응급으로 실려온 환자가 질식하기 바로 직전에 기관 절개에 성공해서 뿌듯해했었던 적도 있는데, 그렇게 연명하신 환자분께서는 암이 경동맥을 파고 들어간 곳에서 발생한 대량의 출혈로 결국 기관 절개 이후 얼마 못 가 돌아가셨습니다. 또 한 번은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끝낸지 얼마 되지 않으신 구강암 환자가 혀에 염증이 발생해 역시 기도를 막아 응급실에 실려왔는데, 국소마취만 한 상태에서 기관을 절개하려는 와중에 치료 때문에 장기와 조직이 섬유증 fibrosis으로 떡이 되어서 지금 절개하려는 것이 기관인지 경동맥(!)인지 알 수 없고, 환자의 혈중 산소 농도는 점점 떨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에 몇십 초 지나면 사망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에 ‘주사기를 꽂아서 피가 나오지 않고 공기가 나오는 부분이 기관이다’라는 식으로 겨우 기관을 찾아서 간신히 심정지까지 가지 않고 절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분도, 집에 귀가하셨다가 스스로 기관 튜브를 잘 돌보지 않으신 나머지 마른 점액과 응고한 혈액이 기관 튜브를 막아 1주일 만에 사망하셨습니다.
수련하면서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의기소침해하곤 했어요. 환자와 의료진 (의사만이 아니라 간호사, 영양사, 방사선 기사,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 심리치료사 … 주욱 가다 보면 청소하시는 분들까지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치료를 견디는 환자 본인의 노력을 잊으면 안 됩니다) 양쪽 모두 어려움을 견뎌가면서 그토록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다니. 이 허망함. 이 슬픔. 이 무의미함.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어땠을까 –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실망하던 저를 건져올려준 사람은 저와 함께 수련했던 선배였습니다. 제 수련 말년차에 막 전문의가 된 선배와 같이 일하게 되었을 때 그 선배가 제게 말하기를,
“(우리 업계에는) 보통 암이 재발해서 수술이 불가능하거나 먼 곳까지 전이되어서 완치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해 줄 것이 없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 자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완치 목적 치료(? Treatment with curative intent)를 받지 않는 환자들이라고 하더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은 많고, 오히려 증상 완화 치료(? Treatment with palliative intent)를 받는 사람들이니까 더욱 더 신경을 써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지. 60%의 5년 사망률도 마찬가지야. 60%에 의기소침하고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다가 잊어버리는 것은 생존하는 40%의 환자들이지.”
제행무상 – 조건 지어진 모든 것들은 생했으므로 반드시 멸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는 옆으로 치워두겠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조건이 모여 생하고, 조건이 흩어져 멸한다라는 이 말은 사실 동어반복이고 원형 논리이기도 해서 반박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웃음) 그렇게, 제가 갈고닦은 모든 것들은 결국 스러질 운명이겠지요. 불교를 수행하다가 찾아오곤 하는 ‘마약 한 느낌’*, 또렷한 주의 attention, 깊은 선정 같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좀 더 치료를 잘 하기 위해 제가 모았던 지식, 경험과 손재주, 조화롭게 동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제가 절제했던 감정, 방종해서 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제가 조절한 몸 상태 등등 – 나이가 들어 몸이 쇠하고 눈이 침침해지고 치매라도 오면 사라질 것은 물론이고, 사실은 잠깐만 주의를 깜박하면 지속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병이 재발하지 않은 환자라도 언젠가는 다른 이유로 반드시 사망하겠지요. 그러니 무상한 것들이 무상하지 않을 것처럼 의지하고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는 것 또한 확실한 진리입니다. 당연하게도 무상한 것이 무상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의지하는 셈이겠지요.**이를 가리켜 제 스승님의 도반 한 분은 ‘실상에 대한 끝이 없고 이길 수 없는 법정 소송 the never-ending and unwinnable lawsuit against the reality’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의지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제가 저질렀던 실수는 ‘생한 것은 멸하게 되어있고, 그러므로 (그런 것에) 의지하면 괴롭다’라는 가르침의 한 쪽 면에만 매달렸던 점입니다. 부연하자면, 가르침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여 무상한 것을 싫어했던 점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싫어해보면 저는 수행에서도 삶에서도 무상한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무시하게 되더군요. 말장난 같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과 무상하다는 것을 받아들여 무상함과 함께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은 무상한 것이 괴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무상함이 없으면 우리의 아이들은 자라지 않고 고통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었지만, (유용한 말이긴 해도) 좋은 면을 취하자면 나쁜 면도 버릴 수는 없다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웃음) 제 문제는 무상함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렇듯이 제가 매달린다는 점이지요. 무상함 그 자체로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매달리든 매달리지 않든 무상함은 바뀌지 않고요. 더군다나 제가 매달리는 것조차, 그리고 매달리는 제 자신조차(!) 무상합니다. 단지, 그것을 기화로 삼아 매달리는 것을 ‘지나가라… 지나가라…’ 하고 있으면 절대로 지나가지 않지만 말이에요. (무엇이?) (웃음)
그 점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무상한 유위의 것들에서도 제가 배울 것은 많고, 유위의 것들은 유위무상한 나름대로 유위무상한 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것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위의 일상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위의 수행까지 말이에요. 유의의 것들은 허망하고, 허망하기 때문에 꾸준히 유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스러집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허망하다고 해서 의미 없다나 쓸모없다와 동치는 아닙니다. 사실 저에게는 오히려 무위가 아니라 유위의 것들이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무위의 것에 대해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이상한 말이지만, 그렇기에 저 또한 괜히 ‘무위의 자리’에서 유위의 것들에게 콧대를 높일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웃음)
언젠가 가을을 맞은 수행처에서 저는 울력 시간에 제게 배정된 일을 하면서 낙엽이 계속 떨어지는 뜰을 쓸고 또 쓸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거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는데요. (아마 다른 분들도 이런 나름대로 운치 있는(!) 일이 아니라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해보셨겠지요. (웃음) ) 나중에 그 일을 떠올리며 어떤 스님 두 분께서 거울에 대해서 하신 말씀들이 기억났습니다 한 분은 거울을 깨끗하게 닦아 먼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다른 한 분은 본래 거울이 없는데 먼지 앉을 곳이 어디인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대해 일본조동종의 한 스님은 조동종은 비록 대승에 속해있으나 그 대승 정신을 지니고 상좌부처럼 수행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고, 한 미국인 재가자 스승은 비록 본래 거울이 없는 것이 맞기는 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거울을 닦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근기인 저는 이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낙엽과 먼지가 오고 가는 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다면, 빗질과 닦음도 좀 다른 것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선원에서 같이 공부하시는 도반 중 한 분께서 공부에 진척이 있을 때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한 몇 주 동안 뭔가 마약 한 느낌이 나고 하는데, 나는 마약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았어. 이러다가 없어지겠지 싶더라고.” 서양의 되바라짐에 대해 당황하는 일도 있지만, 이렇게 멋진 부분도 있습니다. (웃음) 그 한 마디에서 배운 것을 기리기 위해서, 저 스스로는 마약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만(!) 계속 이렇게 ‘마약 한 느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족:
아랫부분은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되는, 그야말로 사족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오히려 방해되거나 ‘저놈 괜한 짓 하는구나’라고 헛웃음 하게 만들지도 몰라요. 그래도 읽고 싶으시면 페이지를 밑으로 내려주세요.
**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왜’라기보다는 ‘어떻게’ 불가능한 것에 의지하게 되는가라는 질문과 관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신은 처음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 부분은 아라한과 보살도 같은 수행의 형태에 관한 점도 있겠지요. 재가자로서의 제 삶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나중 일이 어떻게 될지 결국은 모른다는 점을 떠올립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는 어떤 암 환자가 사망하고 어떤 암 환자가 생존하게 될지 모릅니다.
매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 가령 가장 최선의 치료를 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인가요? 인간의 목숨은 무상하니, 무상한 것을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나요?
말씀하시는 매달리다는 어떤 것인가요? 제게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멋부리려고 던져보는, 답이 이미 정해진 질문은 아닙니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어떤 스님께서는 ‘의문이 있는 곳에 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질문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아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없으니, 모르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제 실수는 다르게 말하자면 무상의 가르침을 적절한 참구 없이 그저 ‘모든 것이 무상하다’라고 해놓고 그 생각에 머물렀던 일입니다. 오래전 어떤 분께서 가르치신 것은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이 조건이 모여 생하고 조건이 흩어져 멸한다’였지요. (‘홀연히 나뉜다’라는 부분은 옆으로 치워두겠습니다.) 인간의 목숨 또한 무상하니, 암 환자가 죽어간다는 것이 순리인 것 또한 맞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말해보자면 – 조건이 흩어질 때 멸합니다. 다시 말해, 조건이 모여있으면 멸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건이 ‘영원히’ 모여있을 수는 없다는 것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무상하니까 그냥 멸하게 내버려 둬’와 ‘조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상적이고 수동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널브러져 있으라고 그분께서 무상의 가르침을 남겨두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도인은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던데요.
도인의 스케줄이 (웃음) 어떤지 저는 모르겠고,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할 일이 없는 도인을 비방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난 척 해봐도 예전에는 찰나에 60,000번 생멸이 지나간다면서요? 왜 말을 바꾼 건가요?
항복하겠습니다. (넙죽)
@@@ 질문들은 다른 분들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제가 실수에서 배운 부분들을 좀 더 나누기 쉽지 않을까 해서 적은 것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누굴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웃음)
@@@ 혹 이 글 어디선가 ‘아, 이 이야기 오래된 책에서 본 적 있어’라고 생각되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가능한 인용을 피하기 위해서 – 쉿! 제게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남기고 싶으시다면 비밀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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